2009년 6월 26일 금요일

단편 붉은 코트

겨울 오후, 햇빛이 약해질때쯤.
빨간코트를 입고 나를 지나치는 여자가 있었다.








그다지 좁지는 않은 집이다.

들어가면 바로 마루와 부엌이 합쳐져 있는 공간이 나온다. 식탁으로 쓰이는듯한 이인용 탁자 하나가 부엌에 더 가깝게 놓여져 있다. 또 그 탁자 바로 곁에는 벽쪽으로 책장이 하나 있다. 탁자와 맞춘듯이 잘어울리는 책장에는 책이 몇권 꽂아져 있다.


그리고 탁자에 여자가 앉아있다.


눈에 띄일만한 미녀는 아니지만 긴생머리를 하고 제법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고있다. 그런 여자가 초조한듯, 혹은 깊이 생각하는듯 턱을 괴고 앉아 있다. 시계를 흘끔흘끔 쳐다보는것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덜컥.


어느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남자가 들어왔다. 이 남자도 미남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살짝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에 왁스를 발라놓은 모양이 외모에 신경을 꽤나 쓰는듯이 보인다. 안경을 쓰고 있는데 교복을 입고 있다면 공부만 하는듯한 인상도 줄수 있을듯이 보였다.


이 남자는 여자와 아는사이인듯 인사도 하지 않고 탁자로 다가가 여자 맞은편에 앉았다.
"누워있더군."
여자가 질문할 내용을 예상했다는듯이 남자가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순간 여자는 아리송한 표정이 되었다.
"수면제 통들과 같이. 입에는 수면제가 쑤셔박혀 있고 말이지."
다시 여자는 이전의 어둡고 초조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이번이 몇명째지? 다섯명은 너끈히 넘은것 같은데."
"나도...더 이상은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처음으로 입을 연 여자의 말은 남자의 질문에서 약간 어긋난듯이 들렸다.
"그렇겠지. 당신의 애인들이 한명한명 죽어 나가니까."
"정말 당신이 해줄수 있는일은 없나요?"
"그 꿈에서 보인다는거 말야? 이봐, 난 정신과 의사지 해몽해주는 사람이 아냐."
"어떻게 그렇게 남일 말하듯 할 수 있죠?"
남자의 빈정대는듯한 말투에 여자가 화난듯이 외쳤다.

그러자 남자가 말했다.
"'남일'이니까."
그리고 순간, 남자가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어이 아가씨, 신고 안하는것 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여자가 기죽은듯 고개를 내리자 남자는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가, 심지어 즐거운듯이 입가를 살짝 올리며 책장에서 책을 한권 꺼내들었다.
"다음 차례는 누가 될까? 오랜만에 추리게임이나 해볼까?"
"..."
"아..호시 신이치씨 책이로군. 이사람 책은 도저히 결말을 예상 할 수가 없어. 뭐, 10페이지 안에 결말이 나오니 별로 상관없긴 하지만."
"이제 어쩔거죠?"
"좀 더 생각해 보자고. 혹시 이 책들 다 읽었나? 읽다 보면 꽤나 재밌어. 근데 나중에 장편을 못읽게 되버리지. 특히나 추리소설들. 이 사람책은 죄다 단편이라 이거 읽다가 애가사 크리스티라도 읽는날에는 성질버린다고."
여자는 마치 남자에 이런 긍정적인 태도에는 충분히 익숙해 진듯 했다. 하지만 도저히 장단을 맞춰줄 기분은 아니었다.
"이사람 책은 정말 기묘하다고. 결과를 예측 할 수 없다는게 사실 이 책의 반전이 거의 기술적인 거라서... 예를 들어서 어떤 별을 쉽게 점령했는데 알고보니 그 별에 수명이 줄어드는 병이 있었다던지. 아, 가장 황당했던건 그거였어. 우주선에서 승무원들이 한명씩 사라지는거. 알고보니 잠에서 깨어나는 과정이었던거야. 꿈이 연결되 있던거지."
남자는 마치 자신의 지식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계속 말해댔다.
"정말 이사람 상상력은 굉장하다니깐. 그러고 보니 나도 고등학생때 이사람책 보고 글 하나 썼더랬지... 꽤나 굉장한 이야기 였는데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어."
자기 자신을 비웃듯 조금 웃은 그는 여자의 주목을 끌고 싶은듯이 손을 한번 튕겼다.
"들어볼래?"
"..."
지금까지 생각에 빠져 있던 여자는 살짝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한번 들어봐."
"...말해봐요"
미소까지 띄우며 권하는 것을 거절하기가 어려웠을까.
"우선 못된 의사가 한명 등장해. 그리고 어떤 여자도 등장하거든? 근데 그 여자가 조금 멍청해. 그래서 그 의사가 작업을 걸어도 몰라. 그 의사기분이 어땠겠어? 무지 더럽겠지. 게다가 그 여자가 문어발을 걸치고 있던거야. 거기까지 알게되니까 의사는 더이상 작업걸 기분은 안되고 이 여자를 어떻게 해서든 망가트려둬야겠다고 생각하는거야."
여자는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의사인지라 뭔가 의학적으로 망가트릴 생각을 하는거지. 그래서 최면술이란걸 이용하는거야. 여기가 반전인데, 최면술로 그 여자를 조종해서 애인들을 한명씩 죽이는거야. 근데 그 최면술 기술이 뭐냐면..."
남자는 여자의 머리를 잡아당겨 잠이 든것을 확인한뒤 말을 이었다.
"어떤 향수 냄새를 맡으면 최면에 들게 하는거지. 굉장하지 않아?"
목소리를 조용히 한뒤 작은 시계를 주머니에서 꺼낸 남자는 여자의 귀 근처에 시계를 놓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물론 꽤나 힘든 일이었지. 여자가 의심하지 않게 한다는게... 확실히 여자의 직감이란게 있긴한가봐. 하지만 그 의사는 결국 '어떻게 하면 자신이 연관되지 않은것처럼 보일까'의 해답을 찾아낸거지. 계속 의사는 그녀가 잘시간에 향수를 놔두도록 했어.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버린거지..."
남자가 말을 멈추자 시계소리만 그 집에 울렸다.


딱.


남자가 어떤예고도 없이 손가락을 튕기자 여자가 기계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남자가 명령했다.
"가서, 죽여"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코트를 입은 그녀는 나를 지나쳐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한손에는 코트만큼 붉은 피를 묻힌채.

펼쳐두기..



댓글 12개:

  1. 그저 뻘소리만 일삼아 블로그를 뻘장판으로 만드는 저보다는 훨씬 건설적이신 겁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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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몰입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글인걸요^^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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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오오 뭔가 유닠크한 단편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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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신호등 - 2009/06/26 23:16
    에....아뇨;;;이것도 뻘글의 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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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엘군 - 2009/06/27 04:41
    넹..잘 읽으셨다니 다행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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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Joshua.J - 2009/06/27 05:38
    유니크......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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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청명 - 2009/06/27 13:54
    ㅎㅎ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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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Noel - 2009/06/27 22:20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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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류이 - 2009/07/02 00:08
    ㅎㅎㅎ 앞으로도 자주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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